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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선국왕의 경호원, 선전관의 경제적 대우

2020. 11.25(수) 15:05
- 안병일, 한국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명지대 법무행정학과 객원교수

[스쿨iTV] 본 칼럼은 조선국왕의 경호실인 선전관청(宣傳官廳)에 근무하는 선전관(宣傳官)의 경제적 대우와 신분적 지위를 고찰해봄으로써 현대사회의 공무원제도와 다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선전관은 서반관직 중 무반 청요직으로 항상 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는 관계로 문관의 한림(翰林, 예문관의 관리로 청요직으로 선망 받음),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으로 국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 등의 관직과 비유되는 서반의 승지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특히, 양반 관료사회에서 현관(顯官)으로서의 혜택을 누리며 후손에게는 음관으로서의 혜택이 주어져 당시 문관 우위의 사회 속에서 무반이 청요직(지위와 봉록이 높지 않으나 후에 높이 될 자리로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벼슬로 요직임)으로 간주되기가 어려웠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선전관의 지위는 상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세조대에는 우의정 홍윤성, 호조판서 노사신, 도승지 윤필상 등으로 하여금 겸선전관으로 중종대에는 이조참의 성희안을 겸선전관으로 임명한 것은 문관 우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선전관에 대한 경제적 대우는 전원 체아록이 주어졌다. 체아록은 조선시대 관료들에게 지급한 반대급부의 일 형태로 정해진 녹봉이 없이 네 계절로 평가한 근무성적의 높고 낮음에 따라 서로 바꿔 녹봉을 주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반직(무관)에는 광범위하게 체아록이 운영되었다.

중종 25년(1530년)전에는 선전관에게 입직의 근태를 근무성적으로 따져서 봉급을 주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니 이후 선전관의 대우가 어떠하였는지는 증빙할 수 있는 사료가 없어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 후기인 영·정조대에 선전관과 겸관을 계속하여 체아록을 받게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체아록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남행선전관의 경우 임명 된지 6개월 후(6삭)에는 사과(정6품)에 상응하는 보수가 주어졌다.

선전관은 체아직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다고 생각되는 4계절의 평균 녹봉을 받도록(四孟朔連等受祿) 함으로써 타 체아직보다 안정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또한 자손들에게 문음의 혜택을 받는 관직이기도 하였다.

선전관에 대한 법제적, 경제적 대우에 대하여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무반직 중에서도 청요직 또는 현직으로 불리던 선전관은 신분적 대우에 있어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선전관의 신분적 지위를 살펴보면, 선전관은 자손이 음직을 물려받기도 했는데 선전관, 부장 자손에게 문음의 혜택이 내려질 만큼 이들 무반직(무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왕조 건국과정이나 왕권강화와 국가체제 정비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공신이 배출되어 왔고 또 그에 못지않게 나름대로 전쟁, 반정 등에서 공을 세운 원종공신과 고위 관료집단들에겐 어떤 형태로든 그에 걸 맞는 예우가 필요하였음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우 등은 강력한 집권책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고 국왕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며 왕권의 신장 내지는 강화를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장된 신권(臣權)을 견제하기 위한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라는 정치적인 이중효과를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아울러 선전관이 국왕의 호위 숙위 등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예우차원에서 음직을 부여했다 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선전관의 신분이 세조 8년에는 5품관 이상으로 임명됐고 세조 10년에는 영의정, 좌의정, 병조판서 등으로 하여금 강무선전관에 임명하였다.

선전관의 인원에 대한 증감을 보면, 세조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위, 궁중숙위에 큰 관심을 두어 15명의 선전관을 설치하였으나 왕권이 비교적 안정된 성종, 중종시기에는 승정원 승지와 비슷한 8명의 선전관을 두고 운영하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이후엔 정치 및 군사조직 등에서 취약성을 드러내고 조정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한 왕권의 약화 등으로 선전관을 38명으로 대폭 증원하였으며 광해군 또한 힘겹게 왕위에 오르고 계축옥사 등으로 인한 견고한 궁중숙위가 필요함에 따라 48명이라는 많은 선전관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선전관 입사자의 신분도 시대적 성격에 따라 변했던 것은 당연한 일로 동반(문관)임명이나 문, 무과출신자를 중심으로 입사시키는 경우도 있었고 문벌이 강화된 16세기 이후에는 문음 출신들이 대거 선전관으로 입사하였다.

특히, 문관은 한림 무관은 선전관이라 호칭될 만큼 안정적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승정원의 승지는 청요직 이라 불리지 못한 반면에 선전관은 실록에 자주 청요직이라 불려 진 것으로 보아 국왕의 측근에서 승지와 동일한 기능을 갖고 중요한 참모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겨진다.
장준덕 기자 hyun@school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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